역사속의 여류문학 1
역사속의 여류문학 1
  • 이미숙 취재부장
  • 승인 2018.03.1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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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 여류시인, 오청취당(吳淸翠堂)

공주대, 충남도립대, 한서대 충남학 강사,충남 문화관광해설사

조선시대 선계(仙界)로 오르길 간절히 원했던,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늘 자신이 하늘나라에서 죄를 지어 인간 세상으로 잠시 귀양 온 선녀라고 생각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오 청취당(吳淸翠堂) (1704-1732)

지금으로부터 300 여 년 전,경기도 양성현 (현 평택 포승)에서 해주 오씨 오기태의 여식으로 태어났다.

불행히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 나야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혼인도 당시로선 노처녀라 할 22살이 되어서야 겨우 하게 되었다.

더구나 상대는 이미 한 번 상처한 재혼 남이었다.

남편이 된 사람은 속칭 한다리 김씨라고 불리던, 경주 김씨 김한량(金漢良 1700-1752)이었다.

서산 음암면 유계리(한다리)에 살고 있던 몰락한 양반 가의 후손으로 가난한 농부와 다름 없는 처지였다.

결혼할 당시 시가의 가세는 기울 대로 기울어 형편이 몹시도 어려워져 있었다.삼대를 거치는 동안 학문가의 가풍은 근근이 이어왔다.그러나 대대로 과거를 포기 하거나 과거에 응시했다 하더라도 합격되지 못하는 불우한 처지가 되어 오랫동안 벼슬살이와는 인연이 없는 집안이 되어 있었다. 남편도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 은거하며 농사를 경영하였기에 거의 평민이나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집을 와보니 얼마나 가난했던지 물 한 잔 달라고 청하기도 미안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의 호인 청취당은 스스로 지은 것이다.

해주 오씨의 관향이 수양이고 수양 땅은 고죽군의 아들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죽은 곳이므로 ‘성자의 맑은 성품과 대나무의 푸른빛을 취한다’는 의미이다. 또 ‘눈 속에 핀 국화’란 뜻의 경설국(慶雪菊)이라는 별호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집와 어렵고 고된 현실에서 자신의 재능과 재주를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항상 하늘이 자신을 이 세상에 무심하게 내려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가지와 잎이 무성한 ‘동국의 계수나무’로 자부하곤 하였다.

그녀는 극도의 가난하고 고된 생활 속에서 25세, 26세 에 연이어 두 자식을 낳자마자 잃는 불행마저 겪어야 했다.

아마도 영양실조인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기들이라 제대로 살 수가 없었던 것 이라 짐작된다.

연달아 자식을 잃은 그녀는 애끓는 고통과 슬픔에 마침내 고질병을 얻게 되었고, 이후 늘 병고에 시달려야만 했다.그리고 불과 몇 년 뒤인 29세에 마지막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생애를 마감 했다

사인(死因)은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 한 탓인지 유방에서 고름을 한 대야씩 짜내다 죽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유선염이나 유방암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는 29년의 짧은 삶 속에서 괴로울 때마다 시와 술로 맺힌 근심을 달래곤 했다.

특히 그녀에게 있어 시는 자신의 고독과 우울한 심사를 덜어낼 수 있는 휴식처요, 이상향이었다.

청취당이 남긴 182수의 한시 속에는 고단한 자신의 삶에 대한 단상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조부모와 부친의 사랑을 받고 자랐던 바다건너 친정집을 생각하며 시로 그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당시는 사대부가의 여성은 학문이나 문학적 재능이 있어도 그것을 세상에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없던 시대였다. 여성의 미덕이란 다름아닌 길쌈과 바느질, 그리고 음식 만들기 등의 여공(여공)에 힘쓰는 것에 있었다. 그녀 또한 허울뿐인 양반 가의 여인이라 표면적으로는 그런 생활을 이어 나갈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면서도 바느질과 같은 매일의 고단한 가사노동을 시적(詩的)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일곱 친구 규방에서 나의 재주 도와 언제나 수중에 따라 다닌다네

가위는 날카로와 옷감 반듯하게 자르고 잣대는 요량 많아 묘한 계책 준다지

가죽 골무 인두 위에서 올리는 공이 높고 울낭자(다리미)는 돌며 바느질 실밥 흔적 없애주네

어찌 너희들과 오랫동안 고생하기 즐기랴 하루바삐 단약(丹藥)고며 천상에 놀고 싶어라

<일곱 친구의 공로를 논하다. 論七友功>"

바느질 할 때 필수적인 7개의 침선 도구들을 의인화하여 자신의 일을 도와 주는 고마운 친구들이라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다. 조선시대 남성들에게 문방사우가 있었다면, 여성들에겐 이처럼 침선칠우(針線 七友)가 있었다. 이 시는 조선 후기 내간체 수필의 백미로 꼽히는 <규중칠우 쟁론기>를 연상시킨다.작자 미상의 이 글 또한 침선도구들을 의인화한 것으로 내용은 7가지 도구들이 서로 자신의 공을 다투는 내용이다.

그런데 오청취당의 이 시에서도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단약’(신선들이 먹는 약)이나 ‘천상’이란 단어에서 하루 빨리 힘든 현실에서 탈피하여 이상 세계로 가고 싶은, 그녀 내면의 깊은 슬픔과 우울을 엿보게 된다.

그리고 외로운 밤의 그녀에게 친구가 되어 준 것이 침선 도구 외에 또 한가지 있었다.

"문닫고 속된 무리 사양하며  다만 누각 엿보는 달을 사랑하였지.

규중 안에 짝이 되어 서로 의지하니 씻긴 마음 고요하고도 그윽하여라.  <달을 사랑함>"

주변의 사람이 아닌, 고고한 달빛을 자신의 벗으로 삼아 의지한다는 시에서 역시 그녀의 짙은 외로움이 느껴진다.

이처럼 그녀의 남겨진 시들을 통해 우리들은 당시 조선 후기 한 여성 지식인의 일상과 고뇌, 문학적 성취를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같은 여성 문인들인 21세기의 우리여성 문인들에겐 정말 귀중하고 보물 같은 자료들이라 하겠다.

그녀 사후 70여 년 뒤 그녀의 시 들은 외손 박종규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청취당집>이란 문집으로 엮어 내게 되었기에 지금까지 전해져 오게 된 것이다.

총 182수의 한시 중에서 마지막 작품인 <병중술회자견 (病中述懷自遣)>은 7언 96구로 된 장편 서사시이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시이기에 곧 한 편의 자서전이자 유언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긴 시를 통해 그녀는 불꽃같고 꿈 같은 자신의 짧은 생애를 회고하였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자란 어린 시절의 애절함, 1728년, 1729년 에 연달아 자식을 잃은 참담한 슬픔, 그리고 혼인 생활의 채워지지 않는 절대 고독 등을 절절히 토해 내었다.`

그녀의 이 시를 우연히 읽고 감동한 임동창(재즈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의 주도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녀의 시비가 있는 옛 집터 일대에서 매년 가을 밤 개최되는 음악회에서 그녀의 이 시를 소재로 한 연주,무용,창 등을 통해 한 많은 그녀의 넋을 위로해주고 있다.

그녀가 죽은 지 벌써 280 여 년.

그 동안 까맣게 잊혀졌던 그녀의 존재가 근년에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은 한 여성국문학자의 문집발굴과 번역 덕분이었다. 그리고 서산시와 문화원의 주도로 이 년 전에는 마침내 그녀가 살았던 집터에 <논 칠우공>의 시비가 세워져 조선시대 요절한 천재 여류 시인으로 새로이 조명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의 집 옆에는 정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있다.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짧은 생을 마감한 청취당의 생애와는 달리 궁궐에서 온갖 부귀영화와 호사를 누렸고,정조 사후에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어 수렴청정을 통한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여인이 정순왕후였다.그녀가 바로 조선 후기 외척인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시작 되게 한 장본인이다.비록 같은 동네에서 지척간에 살았으나 너무나도 달랐던 두 여인의 삶이 극명한 대비가 된다.예나 지금이나 여자팔자는 남편 만나기에 달린 것 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조선 여류 문인의 역사에서 요절한 여자문인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27살에 죽은 허난설헌이 있다. 그녀 또한 뛰어 난 문학적 재능을 살아 생전엔 제대로 드러 낼 수 없었고 심한 고부갈등과 소원한 남편과의 관계로 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녀 또한 연이어 어린 아들과 딸을 모두 병으로 잃었다. 마음의 병은 이후 육신의 병이 되었고 결국 그녀도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살아 생전 허난설헌 그녀도 늘 신선 세 계를 꿈꾸었다. 그녀가 남긴 시중에도 유선시(遊仙詩)가 많다.그녀 사 후 누구보다 누이의 재능과 글을 안타깝게 여겼던 사람이 바로 동생 허균이었다.그에 의해 그녀의 남은 시는 <난설헌집>으로 꾸며지게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엇다. , 이후 중국과 일본의 사신들에 의해 외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기에 한류의 원조라 할수 있다.

이 처럼 오 청취당과 허난설헌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허난설헌 처럼 늘 선계를 꿈꾸었던 오청취당. 그래서 그녀 또한 유선시를 많이 남겼다.

"평생에 무엇이 부러운가  남악에 살고 있는 여선일세.

인간의 고통에서 벗어나  세상사 어려움에 얽매지 않고

놀을 먹고 야윈 뼈 길러 학과 어울려 가벼운 몸 싣도다.

우습구나, 삼십도 못 된 이 몸 고운 얼굴 점차 봄 기운 잃어 감이여.  <내가 부러워 하는 것>"

그녀의 넋이나마 사후 자신이 그토록 되기를 원했던 천상세계의 신선이 되어 이제는 더 이상 고통과 슬픔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고난을 예술로 승화시켜 많은 시를 남긴 오 청취당.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나도 더욱 노력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좋은 작품으로

내 생의아름다운 흔적을 남겨 놓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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