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여류문학 3
역사속의 여류문학 3
  • 이미숙 취재부장
  • 승인 2018.04.0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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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녹아 내리다

     

[성낙규 공주대, 충남도립대, 한서대 충남학 강사]
[성낙규 공주대, 충남도립대,
한서대 충남학 강사]

          

                                  “아내의 웃음 한번은 천금의 값어치이고 

                                     종일토록 보고 있어도 오히려 질리지 않고

                                    아내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

 

남편에게서 이런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여인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것도 엄격한 가부장적 시대로 알려져 있던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여인으로서 말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겐 자신의 애정고백 이나 혼인 후 아내와의 사랑을 시로 노래하는 것은 부인이 죽었을 때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나 용납되었다.

늘 아내와 자식에게도 가장으로서의 체통을 지켜야 했으므로 자신들의 감정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반면에 남편인 그들이 아무런 꺼리낌 없이 마음껏 애정을 쏟았던 대상은 흔히 기생들이거나 첩들이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관습이 만연한 시절에, 살아 생전에도 그리고 아내 사후에도 솔직하게 자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표현했던 사대부가의 한 남편이 있었다. 바로 위의 시를 지은 김성달(金盛達, 1642~1696) 이었다.

더구나 그는 사육신 성삼문 선생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절의를 보인 충신으로 알려진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의 후손이었다. 그의 증조부였던 선원은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이었는데, 종묘사직을 받들고 왕세자와 비빈들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갔다. 그러나 마침내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당하자 남문루에 올라 화약을 터뜨려 장렬히 자결을 하고 말았다. 또한 형제인 청음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끝까지 화친을 반대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다 결국 소현 세자와 함께 인질로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몇 년 뒤 돌아오게 되었던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효종 때 좌의정까지 되었는데 그가 심양으로 끌려갈 때 불렀다는, 시 한 수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 하니 올 동 말 동 하노라

이런 남편에게서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아내의 이름은 이옥재 (李玉齋,1643~1690)였다. 그녀 또한 우의정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월사 (月沙) 이정구 (李廷龜, 1564~1635)의 후손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만남은 당대 최고였던 두 명문가의 이상적인 결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토록 시와 아내만을 사랑했던 김성달. 그는 멀리 떨어진 부임지에서 본가인 홍성 오두리에 있는 병약한 아내 이옥재와 늘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 소식을 전하곤 했다.

서로에게 보낸 절절한 시속에서 두 부부는 변치 않는 사랑을 확인하며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그들이 주고받은 시는 사후 큰 아들 김시택 (金時澤, 1660~1713)이 편찬한 <안동세고(安東世稿)>에 수록되어있다.

<아내에게(寄內)>1.

집은 금오산 아래의 마을에 있는데  천리 고향 생각하면 혼이 녹아 내릴 듯하오.

가을 바람에 밤 대추 딸 만 해질 때인데  몇 번이나 아이들 데리고 북원에 올랐었소?

<아내에게 ()>2

동산의 거둔 과일 광주리에 차지도 않았는데  홀연 사람 그리워 멀리 바라보고 있겠지.

동북의 구름 산은 천 길이나 떨어져 있으니  응당 근심스런 생각으로 길가에 서 있을 것을.

남편은 아이들과 외로이 있을 아내가 그립다 못해 혼 이 녹아 내리고, 병약한 아내소식에 늘 눈물을 흘리던 다정하고 감성적인 남자였다. 그 의 시에 답한 아내의 시 또한 그리움으로 애절하다

<원운(元韻)>2

밤새도록 요란한 비바람 맑게 개이니 배나무에 꽃은 날고 살구는 푸르네.

나는 오주에 당신은 타향에 있으니, 그리움에 두견새 소리 시름겹게 듣네요.

<원운>

날마다 사창에 기대어 이별의 한 길은 데 술 잔 가는 곳마다 가장 잊기 어렵네.

오늘 아침 농어회 또 보게 되니  한스럽게 바라보나 그대 옆에 없는 것을.

이처럼 서로 헤어져 있을 때 서로를 늘 생각했던 두 부부는, 남편이 가끔 관직을 쉴 때는 고향 오두리 집에서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함께 집 근처의 반구헌 (伴鷗軒)에 올라 멀리 보이는 어촌의 풍경을 바라보며 같이 술 잔을 기울이거나 시를 지었고, 계절마다 정원에 피는 꽃을 감상하며 거닐거나 서로 차운(次韻)을 따 시를 주고 받았다. 자주 내기 바둑을 두면서 지는 사람이 벌칙으로 시를 짖기도 했다. 그야말로 그들 부부에겐 바로 시가 일상이었고 서로에 대한 감정 교류와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이처럼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그들의 아홉 자녀들도 모두 남녀 구별 없이 교육받았고 누구나 시를 지을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鴨東古今 未曾有) 전무후무한 가족문학사’ 라고 조선시대 이규경은 <시가점등>이란 시화 비평서에서 이 집안을 극찬 했던 것이다. 그는 당대에 지금 있는 필사본이 아닌 원본을 직접 보았던 사람이다. 그가 언급한 그들 가족의 시집인 <안동세고>와 <연주록(聯珠錄)>을 보면 부부뿐 아니라 아홉 자녀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시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 자녀들 중에서도 막내 딸이었던 김호연재 (金浩然齋,1681~1722)가 조선 후기 충남 제일의 여성 문인으로 칭해 질 만큼 풍부한 감성과 명문가의 자부심을 지닌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위에서 보듯 두 부부는 자식을 무려 열명이나 낳았다. 6남 4녀를 두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았고, 또 그 사랑이 죽어서도 영원하기를 바랬다. 그 증표로 두 사람은 산과 바다를 두고 시로써 맹서하기도 했다.

<원시 (元詩)_이옥재>

청주옹과 옥재의 즐거움은 바다와 산에 맹서하여 단심 고치지 않네.

백년가약 중한 인연 하루와 같이 백발에 마주해도 함께 평안할 것을.

<아내의 회음 시에 차하여 (次內回吟詩)>

끝없는 정 있음에 한없이 기쁘니 백발 꺼려 않고 단심 함께 나누고져

다시 모름지기 세세토록 부부 되어 저승에서도 복록 누리며 절로 편안하기를.

병약했던 이옥재는 결국 42세의 젊은 나이로 영원히 남편 곁을 떠나고 말았다.그 뒤, 김성달은 매일 사무치는 그리움에 괴로워하며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아내를 잊지 못한 남편은 죽은 아내를 위해 어떻게 하면 오두리 바닷가 언덕 마을에 비석을 세워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도하였다는 내용이 <안동세고>에 보면 나오기도 한다.

다음은 그가 아내 사후 지은 그 절절한 그리움의 사부곡(思婦曲)들이다.

<망인을 애도하며>

슬퍼해도 소용없는 이미 죽은 사람인 것을 슬퍼하면 이 몸만 상할 뿐이네

잊지 않고자 않은 것은 아니나 잊을 수 없어 말만하면 쇠한 눈물 수건을 적시는구나.

<옛 요를 깔고 누워 아내의 꿈을 꾼다>

맑은 밤 지난 날의 이부자리 가져다가 침상을 펴고 누워 그대의 꿈을 꾼다.

기쁜 웃음 마치기 전 놀라 깨어 일어 나니 창가에 비치는 한 월 그대의 넋이리.

 

동생 내외가 며칠 전 결혼 25주년을 맞았다.

은혼식을 맞은 동생내외에게 축하의 말을 뭐라고 해줄까 고민하다 문득 김성달과 이옥재 부부가 떠올랐고 나는 그들의 시 중 산과 바다를 두고 백년가약을 맹서한 시를 적어 보내주었다.

앞으로도 두 사람이 더욱 사랑하고 아끼며 백년 해로하기를 언니로써 바라며 이 글 한편도 같이 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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