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여류문학 4
역사속의 여류문학 4
  • 이미숙 취재부장
  • 승인 2018.04.1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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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일헌 (南貞一軒) 의 삶과 문학
  

 

성낙규 충남문화 해설사
공주대, 충남도립대, 한서대 충남학 강사
저서: 수필집 <마음의 정원>
(논문: 보령충청수영성의 역사문화사적 가치와 현대적 활용방안에 관한 연구)  

 

세상이 모두 잠든 야심한 시간 여인은 시어머니가 잠이 깰까 숨죽여 별채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몇 일 전부터 집안 식구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숨겨두었던 나무장작들을 불에 잘

탈 수 있도록 차곡차곡 잘 쌓아 올렸다. 그런 뒤 불씨를 장작더미에 붙였다.

그녀는 그 불타는 장작 더미위로 올라서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때, 갑자기 달려오는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막 불길 위에 올라서려던 그녀가 멈칫하며 돌아보니, 어느새 잠에서 깬 시어머니가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달려와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근처에서 그녀를 끌어내었다.

그리고는 며느리를 껴안고 흐느끼며 다음과 같이 타이르고 위로했다.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살다 죽는 것이 너의 효니라.

그녀와 시어머니는 서로를 끌어안고 그 뒤 오래도록 대성통곡을 하였다.

죽은 남편을 따라 가기 위해 20살의 꽃다운 나이에 끔찍한 분신자살을 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만 여인의 이름은 남정일헌(1840-1922)이다.

남편인 성대호가 결혼 4 년만인 21세의 나이에 병사하여 장사를 치룬 몇 일 지나지 않은 밤이었다.

남정일헌 그녀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의 7세손인 명문가의 규수이다. 나이 16살에 우계 성혼의 후손인 예조판서 성원묵의 손부가 되어 창녕성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그녀는 시어머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마음을 고쳐 먹고 시부모님을 비롯해 시조부모님들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것에서 생의 보람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처럼 의지했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예뻐해 주셨던 시조부모님들도 연달아 돌아가셨기에

자신이 집안의 실질적인 안주인이 되어야 했고, 혼자 남으신 시아버지를 보살펴 드릴 사람이 며느리인 자기 뿐인지라 더욱 더 정성을 다해 봉양했다.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며 시아버지는 양자를 들이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도 죽은 아들을 대신해 양자인 손자를 들여서라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했다. 또한 자신도 이제 늙어 오래 살지 못할 텐데 그러면 그 뒤 혼자 남겨져 의지할곳 없을 불쌍한 며느리의앞날 또한 걱정되었던 것이다.

남정일헌은 병든 노구를 이끌고 예산에서 파주까지 양자를 구하러 먼 길을 떠나는 시아버지를 눈물로 보내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시부께서 양자를 구하러 파주로 가시다>

이 몸은 아들 없고 남편도 없어다만 시부모 모시다가 마침내 시어머니도 잃었네

시동생이 낳은 어린 아이 바라니 어느 때에 나나니벌같이 포로를 지고 오리오

다른 사람은 아들 있는데 나는 양자 구하니 병든 시아버님 길 가며 눈물이 얼마나 나실까

밤낮으로 기원하는 일은 오직 대를 이을 수 있는 것

봉황의 새끼는 그 어디에서 향기 뿜는가 명령이 새끼를 두거늘 과라가 업어가도다

네 자식도 가르치고 깨우쳐 선으로 그것처럼 착하게 키우라

<尊舅以求螟事行次坡州>

此身無子又無夫 只恃舅姑竟失姑 望弟生兒兒未育 何時蜾臝負蒲蘆

他人有子我求螟 病舅登程淚幾零 日夜祈望惟在此 鳳雛何處生寧馨

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

그 뒤 그녀의 삶의 희망은 오직 양자로 얻어 온 아이를 자기가 낳은 친자식처럼 정성을 다해 훌륭히 키워 내는 것에 있었다.

<병아리>

날개로 동그란 알을 덮어 자연히 이십 일이 지나갔네

암컷은 자애롭고 부지런한 어머니 되고병아리는 껍질을 깨고 나오네

새끼를 먹이려 벌레 개미 구하고 까치와 까마귀 피하라고 자식에게 경계했네

닭을 보면 나도 깨달음이 있으니 양자 들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못하겠네

<鷄兒>

翼覆團團卵 自然卄日踰 雌慈勤作母 甲圻乃生雛

哺子求虫蟻 警兒避鵲烏 觀鷄吾有得 負臝不辭劬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여인인 그녀로서는 그리운 부모님이 계시는 친정 집에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 계집종이 자기부모를 보러 집에 다니러 가게 되는데, 그것을 부러워하며 한 편의 시로 자신의 아쉬움과 슬픔을 달래기도 했다.

<계집종이 부모를 뵈러 가다 >

어린 계집종 나이는 열넷 걸어서 친정 부모 뵈러 간다 하네

슬프다, 규중에 있는 나는 언제나 친정 뜰을 지나리

<送童婢歸覲>

童婢年十四 徒步告歸寧 嗟我閨中處 何時過鯉庭

자신의 반평생을 돌아보며 그 험난하기가 삼국지에 나오는 촉산(중국 사천성에 있는 험난한 지형의 산) 과 같이 위태로웠다고 회고한다. ‘가슴속의 가시’’웃음 속의 칼’같은 표현은 그녀가 얼마나 주위 사람들로 인해 평생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상징적인 말들이다.

그러나 남정일헌은 그 외롭고 억울함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시를 지었고, ‘정신 승리법’으로 이 시끄러운 세상이 아닌 신선들과 선녀들이 사는 신선세계에서 복숭아 나무를 심으면서 그렇게 초연히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녀 역시, 불운한 삶을 살다 요절하여 자신들의 문학적인 재능을 제대로 꽃 피워보지 못했던 선배 시인들인 허난설헌이나 오 청취당, 그리고 김호연재 처럼 이 세상이 아닌 신선세계를 꿈꾸며 힘든 현실을 버텨나갔던 것이다.

<험난한 생을 살다>

반세기 어두운 길 한 걸음에 달려왔으니 여름 밭두둑과 제나라 성곽처럼 도도하네

이르는 곳마다 기울고 위태로워 촉산의 길이고 항상 거꾸러지고 엎어지니 무협도 같네

해를 당하고 나서야 가슴속의 가시를 아니 잘 지낼 때는 누가 웃음속의 칼을 생각이나 했겠나

문을 닫고 종적을 감추어도 오히려 고통이 몰려오니 신선세계 들어가 복숭아나무 심는 법 배울 것을 생각하네

<行路難>

半世冥行走一遭 夏畦齊郭摠滔滔 傾危到處蜀山路 飜覆常時武峽圖

見害方知胸裏棘 結歡誰測笑中刀 杜門鏟跡猶侵苦 思入仙源學種桃

양자 성태영은 어머니 남정일헌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고 존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서는 드물게 살아 생전인 55세 무렵에 자신의 시문집을 아들에 의해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난리통에 시 문집들이 거의 다 불타 버리고 만 것은 무척이나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 사후 1년 뒤 집에 남아 있던 61편의 시들을 수습하여 다시 문집을 만든 것이 현재 우리에게 전하는 <정일헌시집>이란 시문집이다. 정일헌은 1922년에 사망했기에’조선의 마지막 여 선비(女士)’라고도 한다. <주역>책을 특히 즐겨 읽었다고 하는데, 자신의 호인 ‘정일(貞一)’도 주역에 나오는 ‘사물의 변동은 무궁하나 마침내 하나의 이치로 돌아간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도고산 아래 살았기에 집의 이름을 도운각(道雲閣)이라고 지었다.

그녀가 살았던 곳은 예산 간양리 구두물 마을이고, 그곳 에 가면 생가 터와 무너진 담장이 남아있어 그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그 마을에는 그녀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녀가 썼던 식기 등 여러 유물들도 전해지고 있다. 묘소는 아산 농은리에 있다.

작가는 죽고 없어도 그의 작품은 남아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여인으로 외롭고도 힘든 삶에서 한 가닥 위안과 버팀목이 되어준 시

자신의 슬픔과 고통이 창작의 원천이 되게하고,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남정일헌,  ‘살아 있는 열녀이며 문학인’ 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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